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원 간섭기 (문단 편집) == 원 간섭기 성격 논의 == ## 토론 합의(https://namu.wiki/thread/ImminentShyUnableField)에 따라 본 단락에서 용어를 서술할 때 괄호 안에 영어를 병기하는 것이 허용됩니다. [include(틀:MPOV, 토론번호=UttermostProudLikeableCredit)] >고려의 왕은 더욱 충정을 더하여 나라의 번직(藩屛)이 되었고, 그 지위는 높은 정승에 이르렀으며 훈위는 주국(柱國)의 반열이고, 대대로 그 왕위를 전하며 사해(四海)에 드러낸다. 현토(玄菟), 낙랑(樂浪) 사이는 백성들이 편안하고 물산이 번성하며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린다. >---- >髙麗之王克篤忠貞為國藩屏位至上相勳列柱國世祚其王以表四海玄菟樂浪之間民恬物熙雞犬相聞 >---- >[[https://ctext.org/wiki.pl?if=gb&chapter=964945|《陳剛中詩集》, 〈元奉使與安南國往復書〉.]] 원 간섭기 [[고려]]와 몽골의 [[종속 지역|종속 관계]]를 두고, [[독립국]]으로 유지되는 한편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이중적인 현상 때문에 당시 고려의 위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여몽관계를 전통적 [[한중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조공책봉관계론'이 있으며, 김호동과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몽골제국]]의 구조 속에서 위치를 파악하여 각각 대몽골 울루스의 외연적 속국, 카안 울루스의 내포적 속령으로 규정하거나 '투하령(고려왕부)'으로서 재래왕조체제가 유지되긴 했으나 그 강역 자체를 고려국왕이 배타적으로 점유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최윤정은 고려가 몽골 지배하의 속국 중에서 매우 특별한 경우로서 독립국으로 유지되었으며, '분지분민(分地分民)'에 근거한 '투하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종석은 고려가 제국 영내의 직할지도, 분봉지도 아니지만 몽골(원)과 '혼일(混一)'되었다고 할 정도로, '외국'이라는 위상이 강조 없이 당연시 되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해석한다.[* 森平雅彦(1998), "高麗王位下の基礎的考察-大元ウルスの一分權勢力としての高麗王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6; 최윤정(2013), "駙馬國王과 國王丞相", 《大丘史學》 111;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한편 대만의 역사학자인 샤오지칭(蕭啓慶)은 당대 고려의 지위가 근대 식민제도 중 간접통치하에 놓인 [[보호국]]에 준한다고 해석하기도 했다.[* 蕭啓慶(1983),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与强權政治>, 《元代史新探》]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